모리 히데모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모리 히데모토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이다. 1579년 빗추국에서 태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가 되었으나, 가독 상속을 고사하고 독립하여 스오, 나가토 두 지방의 영지를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내통한 깃카와 히로이에로 인해 전투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 이후 조후 번주가 되어 조슈번의 정무를 총괄하며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1650년 에도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후번주 - 모리 시게타카 (에도 시대)
모리 시게타카는 에도 시대 조슈 번의 13대 번주로서 재정 개혁, 군비 확충, 경제 부흥을 추진했으나, 가혹한 연공 징수로 민중들의 저항을 겪었다. - 조후번주 - 모리 쓰나모토
모리 쓰나모토는 에도 시대 조후 번의 2대 번주였으며, 숙부에게 영지를 분여하고 검약과 문무를 장려하는 등 번정을 펼치고 문예를 즐기다가 아코 낭사 사건 당시 낭사 처형을 맡은 인물이다. - 조후 모리가 - 모리 시게타카 (에도 시대)
모리 시게타카는 에도 시대 조슈 번의 13대 번주로서 재정 개혁, 군비 확충, 경제 부흥을 추진했으나, 가혹한 연공 징수로 민중들의 저항을 겪었다. - 조후 모리가 - 모리 쓰나모토
모리 쓰나모토는 에도 시대 조후 번의 2대 번주였으며, 숙부에게 영지를 분여하고 검약과 문무를 장려하는 등 번정을 펼치고 문예를 즐기다가 아코 낭사 사건 당시 낭사 처형을 맡은 인물이다. - 빗추국 사람 - 호조 소운
호조 소운은 무로마치 막부의 중신으로 이세 종수이나 이세 신쿠로 등으로 불렸으며, 이마가와 가문의 가독 다툼에 개입하고 이즈, 사가미 등지를 정복하며 고호조씨의 기반을 마련한 센고쿠 시대 초기의 중요 인물이다. - 빗추국 사람 - 시미즈 무네하루
센고쿠 시대 무장 시미즈 무네하루는 모리 가문의 가신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주고쿠 정벌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공에 맞서 다카마쓰성에서 용맹하게 항전하다 혼노지의 변 이후 성 수비병의 생명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할복한 인물이다.
| 모리 히데모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일본어 이름 | 毛利 秀元 (모리 히데모토) |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 출생 | 1579년 11월 25일 |
| 사망 | 1650년 11월 26일 |
| 초기 이름 | 호이다 미야마쓰마루 → 모리 미야마쓰마루 |
| 별칭 | 존칭: 하치스카 아키노카미 |
| 계명 | 지몬지 코잔 겐요 다이코지 |
| 묘소 | 도쿄도 미나토구 센가쿠지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코잔지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도요타케 신사 |
| 관위 | 우쿄다이부, 가이노카미, 정4위상 시종, 정3위 참의 |
| 막부 | 에도 막부 |
| 섬긴 가문 | 모리 데루모토 → 히데나리 |
| 번 | 나가토국 조후 번 번주 |
| 씨족 | 호이다 씨 → 모리 씨 |
| 아버지 | 호이다 모토키요 |
| 어머니 | 쇼케이 묘주 (무라카미 미치야스의 딸, 묘주인) |
| 양아버지 | 모리 데루모토 |
| 배우자 | 정실: 다이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딸) 계실: 조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마쓰다이라 야스모토의 딸) 측실: 겐도쿠인, 쇼후쿠인, 구본인, 혼코인, 즈이호인, 춘고인 |
| 자녀 | 쇼기쿠코 (모리 나리타카의 정실) 미야코 이마코 미야마쓰마루 미쓰히로 나가기쿠코 (나가이 나오유키의 정실) 지기쿠코 (야마자키 도요하루의 정실) 만기쿠코 (이나바 마사노리의 정실) 기사코 모토치카 다케치요코 (도이 도시나가의 정실) |
| 군사 경력 | |
| 소속 | 모리 씨 |
| 참전 | 임진왜란 (1598년)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오사카 전투 (1614-1615년) 시마바라의 난 (1637-1638년) |
2. 생애
덴쇼 7년(1579년) 11월 7일, 호이다 모토키요의 장남으로서 빗추국 사루카케 성(猿掛城)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였으며, 특히 정유재란에서는 병중인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하여 모리 군 3만을 이끌고 우군(右軍)의 총대장이 되어 황석산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즉산 전투에서 명군을 격퇴하였다.
모리 히데모토는 종형제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로 들어가 모리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으나, 분로쿠 4년(1595년)에 데루모토가 아들 쇼주마루를 얻자 가독 상속을 고사하였다. 게이초 4년(1599년)에 히데모토는 독립 다이묘로서 별가를 창설하여, 데루모토에게 스오·나가토 양국에 20만 석의 영지를 분할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모리 가문은 서군에 속하였으나, 히데모토는 깃카와 히로이에의 내통으로 인해 출진하지 못하고 방관하였다. 결국 서군은 패배하였고, 히데모토는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함께 철저 항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모토는 나가토국 내 6만 석 영지를 받아 조후번(長府藩) 초대 번주가 되었다. 또한 본가 후계자인 히데나리의 후견을 맡아 조슈번 정무를 총괄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를 계실로 맞이하고, 오사카의 진에 참전하는 등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1]
만년에는 에도에 거주하며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자문관이 되었다. 간에이 7년경부터 모리 종가 당주 히데나리와 갈등이 심해졌다. 게이안 3년 10월 3일, 히데모토는 에도에서 72세로 사망했다.[1][2]
2. 1.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덴쇼 7년(1579년) 음력 11월 7일, 호이다 모토키요의 장남으로서 빗추국 사루카케 성(猿掛城)에서 태어났다.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 등)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였다. 특히 정유재란에서는 병중인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하여 모리 군 3만을 이끌고 우군(右軍)의 총대장이 되어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과 함께 황석산성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명군과 즉산 전투에서 교전 중이라는 급보를 받고 구원하여 명군의 후방에서 공격, 격퇴시켰다.
모리 히데모토는 종형제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로 들어가 모리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으나, 분로쿠 4년(1595년)에 데루모토가 아들 쇼주마루(松寿丸)를 얻자 가독 상속을 고사하였다. 게이초 4년(1599년)에 히데모토는 독립 다이묘로서 별가를 창설하여, 데루모토에게 스오·나가토 양국에 20만 석의 영지를 분할받았다.
2. 2. 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모리 가문의 운영은 모리 히데모토와 깃카와 히로이에가 맡고 있었다. 모리 가문은 서군에 속하였으나 당주 데루모토는 서군의 총대장으로서 오사카성에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세키가하라로 향한 것은 이 두 사람이었다.히로이에는 서군의 승리를 의심하고 동군에 몰래 내통하여 "모리 가문은 표면적으로는 서군이지만 전장에서는 싸우지 않고 동군에 협력하겠다. 그 대신, 동군이 승리했을 때 영지를 그대로 안도받게 해 달라"고 교섭하고 있었다. 히데모토 자신은 싸울 마음이 있었다고 하지만, 선진의 히로이에가 모리 군의 진격로를 막고 버티는 바람에 출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모리 군의 뒤에 포진하고 있던 조소카베 모리치카 등이 재차 출진을 재촉하자, 이에 당황한 히데모토는 궁한 나머지 "지금 병사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다."고 대답하며 시간을 벌었다(재상님의 빈 도시락(宰相殿の空弁当)).[4][5] 몇 번에 걸친 출진 요청에도 모리 군세가 계속 방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코쿠지 에케이, 조소카베, 나쓰카 마사이에 등 난구 산(南宮山)에 진을 치고 있던 다른 부대들은 히데모토가 동군과 내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여,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들도 방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전투 초기에는 서군이 약간 우세한 상황에 있었으나, 난구산의 군세가 움직이지 않는데다 설상가상으로 마쓰오 산(松尾山)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반하여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곧 서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히데모토와 히로이에 등은 싸우지 않고 전장에서 이탈하였으나 동군의 추격을 받게 된다.
전투 뒤, 오사카 성으로 퇴각한 히데모토는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함께 철저 항전을 주장했지만, 데루모토는 이에 응하지 않고 성을 나와 퇴각하였다.
2. 3. 에도 시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모토는 나가토국 내 6만 석 영지를 받아 조후번(長府藩) 초대 번주가 되었다. 또한 본가 후계자인 히데나리의 후견을 맡아 조슈번 정무를 총괄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를 계실로 맞이하고, 오사카의 진에 참전하는 등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1] 번주 히데나리의 대리로서 막부와 교섭하기도 했다.만년에는 에도에 거주하며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의 오토기슈(자문관)가 되었다. 간에이 7년(1630년)경부터 모리 종가 당주 히데나리와 갈등이 심해졌다. 히데모토는 노중(老中) 나가이 나오마사에게 모리 본가와 별개로 주인장(朱印状)을 받으려 하거나, 간에이 11년(1634년) 에도 성 토목 공사 지원 요청을 거절하는 등 히데나리에게 반항했다. 히데나리의 동생 모리 나리타카(毛利就隆)의 조슈 번 독립 시도에 히데모토가 막부와의 중재를 맡기도 했다. 히데나리는 히데모토의 행동에 격노했으나, 히데모토는 쇼군 이에미쓰와 친밀했기에 처벌이 쉽지 않았다.
게이안 3년(1650년) 윤 10월 3일, 히데모토는 에도에서 72세로 사망했다.[1][2]
3. 인물
모리 히데모토는 강단 있고 지략이 뛰어난 무장으로 평가받는다. 완력이 강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조후 번주이자 본가 집정으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삼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히데모토의 기량이 우수하고 조부 모리 모토나리를 닮았다고 평가했다.[1][2]
에도 시대에는 에도 성에 출사할 때 도시락으로 연어 회를 가져갔는데, 다른 다이묘들이 몰려들어 거의 다 빼앗겼다는 일화가 있다.
히데모토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조선 출병에서 우익을 지휘하는 장군으로 선발되어 3만 명의 병사를 이끌었다.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 여섯 장군의 지원을 받아 부산을 공격하고 전주로 진군하여 사천과 창평을 함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모토는 모리 가문의 총대장으로 1만 5천 군세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실전 경험 부족으로 사촌 형 깃카와 히로이에의 내통을 간파하지 못했다. 전투 이후, 오사카의 진 때 도요토미 측에 군자금과 병량을 지원한 주모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4. 평가
모리 히데모토는 강단 있는 무장이자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 가문의 총대장으로 1만 5천 명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실전 경험 부족으로 사촌 형 깃카와 히로이에의 내통을 간파하지 못했다.[1]
힘이 강해서 바둑판 위에 사람을 세우고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
에도 시대 에도 성에 출사할 때 도시락으로 연어 회를 가져갔는데, 다른 다이묘들이 "비싸고 보기 힘든 귀한 생선"이라며 샘을 내 거의 다 빼앗아 갔다는 일화도 있다.[1]
4. 1. 긍정적 평가
모리 히데모토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1만 5천 명의 군세를 이끌고 모리 가문의 총대장으로 참전할 정도로 지략과 강단을 갖춘 무장이었다.[1] 그의 삼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히데모토를 기량이 우수하고 조부 모리 모토나리를 닮았다고 평가했다.[1]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의 제2차 정유재란에서 히데모토를 우익 지휘관으로 발탁하여 3만 명의 병사를 맡겼다. 히데모토는 가토 기요마사, 쿠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 여섯 장군의 지원을 받으며 부산 공격, 전주 진군, 사천과 창평 함락 등 경상도 지역에서 일본군 공세를 이끌었다.[2]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모토는 조슈번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번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행정 시스템을 개혁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37만 석이었던 하기번의 지행을 57만 석까지 끌어올렸다.[1]
4. 2. 부정적 평가
모리 히데모토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가문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영지가 축소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히데모토는 1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군에 참전했지만, 선봉장이었던 깃카와 히로이에가 동군에 내통하여 전투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1] 이로 인해 히데모토의 영지는 20만 석에서 5만 석으로 크게 줄어들었다.[1]또한, 히데모토는 조슈번의 실권을 장악하고 종가와 지속적인 갈등을 빚어 가문 내 분열을 야기했다는 평가도 받는다.[1] 오사카의 진 당시 도요토미 측에 군자금과 병량을 지원하려 했던 정황은[1] 히데모토의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1]
4. 3. 종합적 평가
모리 히데모토는 강단 있는 무장이자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세키가하라 전투에 모리 가문의 총대장으로 1만 5천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실전 경험 부족으로 사촌 형 깃카와 히로이에의 내통을 간파하지 못했다.[1]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조후 번주이면서도 본가의 집정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여 37만 석이었던 하기 번의 지행을 57만 석까지 끌어올렸다. 이는 히데모토와 마스다 모토나가의 공적이다. 다만, 오사카의 진 때 도요토미 측의 호의를 얻고자 군자금과 병량을 오사카성에 보내려 한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깃카와 히로이에와 같은 기회주의적 태도로 평가받기도 한다.[1]
삼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히데모토의 기량이 우수하며, 조부 모리 모토나리를 닮았다고 평가했다. 완력이 강해서 바둑판 위에 사람을 세우고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
에도 시대에는 에도 성에 출사할 때 가져간 연어 회를 다른 다이묘들에게 빼앗겼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히데모토는 모리 데루모토와는 달리 뛰어난 지도자로 여겨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는 이에야스에게 강하게 반대했지만, 전투 이후에는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히데모토는 에도 시대 내내 이에야스 휘하의 최고 사령관으로 남아 있었으며, 오사카 전투와 시마바라의 난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1][2]
5. 가족 관계
| 본가 | 호이다 모토키요(穂井田元清) (1551년 ~ 1597년) |
|---|---|
| 어머니 | 쇼케이 묘쥬(松渓妙寿) (? ~ 1590년) - 무라카미 미치야스(村上通康)의 딸 |
| 양부 |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1553년 ~ 1625년) |
| 처 | |
| 자녀 |
6. 관련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Mori Hidemoto – SamuraiWiki
http://wiki.samurai-[...]
2007-03-28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3]
문서
오다이노가타의 손녀
[4]
문서
히데모토의 관위 산기의 별칭이 재상으로 히데모토는 아키 재상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유래한 명칭이다.
[5]
문서
히데모토는 후쿠하라 히로토시를 통하여 히로이에의 내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가문의 존속을 위해 묵인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